옛날 같진 않지만, 세월이란, 더구나 여자에게 7년의 세월이란 나 정도의 변화는 상식적인 것 아니겠어. 갑자기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구. 나는 전화를 끊고, 연둣빛 원피스를 하나 사 입었어. 그 남자가 연두색을 몹시 좋아한다는 걸 생각해냈거든.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남자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이 없었어. 내가 20분 늦긴 했어. 거울 보고 화장 고치고 하느라고 말야. 나는 커피숍 홀을 두 번이나 돌았지. 그런데도 그는 없었어. 이상하다 하고 막 고개를 돌리려는데 저편에서 어떤 뚱뚱한 여자하고 고개를 맞대고 주스를 마시고 있던 남자가 나를 부르는 거야.
"여기에요, 여기!"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세상에 J야, 바로 그 남자였어. 머리는 대머리가 되었고, 툭 튀어나온 배는 태산이고, 코밑까지 살이 쪄서 얼굴이 뭉개져 있으니 내가 어떻게 그를 알아보겠니. 거기다가 그는 나는 아랑곳없이 옆에 앉아 있던 뚱뚱한 여자에게 나를 인사시키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 좀 들어봐.
"옛정을 생각해서 해명 좀 해주세요. 내가 지난 7년 동안 윤희씰 단 한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습니까? 예? 옛이야기로 다 묻어두고 한 결혼인데,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내가 윤희씨한테 왔다갔다한다는 거예요. 이렇게 직접 확인을 해야겠다니 어쩌겠어요? 사실대로 대답 좀 해주세요. 근데 윤희씨 많이 변했네요? 왜 이렇게 뚱뚱해졌어요?"
나 원 참, 기가 막혀서. 함께 살면 제 집사람 살찐 건 보이지도 않나보지? 아이구 또 저는 어떻고. 초여름이고 연둣빛이고 뭐고 다 기가 막히더라고. 그 커피숍 나오자마자, 집으로 달려와서 냉장고 문을 확 열어 제꼈지. 온갖 음식들을 죄다 식탁에 내놓고 나서야 새로 산 원피스를 난폭하게 벗었어. 편하게 앉아서 먹어 치우려고.
-신경숙 소설, 중에서, ‘냉장고 문을 여는 여자’ -
가끔 떠오르는 추억이 있습니다. 한때 뜨겁게 사랑하고 죽을만큼 사랑했던 그때의 추억이 문득 떠오를때가 있죠. 비록 그때는 상처가 됐던 시간이라고 해도 시간이 흐른뒤, 상처도 추억이 되더군요. 그러니 그 추억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말아주세요. 그것이 한때나마 사랑했던 사람끼리 지켜야할 마지막 약속입니다.
-sbs <아름다운이아침> 사랑, 아직 끝났지 않았다 중에서 -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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